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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차영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왼쪽 네번째)이 지난달 18일 한 무명용사의 신체 일부가 수습된 호에서 국화꽃 한송이를 들고 헌화한 뒤 경례를 하고 있다. |
6.25 전쟁이 발발한지 올해로 64년을 맞았다. 전쟁 당시 국군 전사자와 실종자 수는 16만2374명에 이른다. 이중 2만9202명 만이 현충원에 안장됐다. 아직도 이름모를 산야에 묻혀 고향과 유족들에게 돌아가야 할 유해가 13만여구에 이른다.
이들은 조국의 부름을 받아 대한민국과 자유를 목숨으로 지켜냈다. 그래서 정부는 이들의 고귀한 희생을 잊지 않고 있다. 이들을 찾아 모시는 것이 바로 국가의 무한책임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2000년부터 14년째 유해를 찾아 가족의 품으로 돌려주고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8000여구만 수습하는데 그치고 있다.13만여구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전사자 매장 기록도 거의없어 유해발굴 사업이 더디지만 호국영령의 얼을 모신다는 일념하나로 전국의 산과 들을 누비며 64년전의 흔적을 찾는 유해발굴사업단의 발굴 현장을 동행했다.
60년만의 귀환…무명용사 정강이뼈 등 일부 수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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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 장병들이 수습된 신체일부를 유해도에 올려놓고 있다. |
지난 19일 오전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야시대리. 아스팔트가 끊겨 좁아진 산길을 차로 1시간 남짓 달려 가리산 무명 710고지 중턱에 멈춰섰다.
첩첩산중이라 더 이상 차량 진입이 불가능해 해발 400m 부터는 가파르고 험준한 산길을 수풀을 헤치며 올라갔다. 전방 10m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했다.
안개로 평온한 듯 보이지만 안개뒤로 적을 향해 총구를 겨누면서 마지막 결전을 펼쳐야 했던 영화 ‘고지전’의 한 장면이 연상됐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형제, 자식들을 생각하면서 ‘전선야곡’을 부르고 전쟁의 두려움을 극복했던 영화의 일부분을 60여년이 지나 마주하니 경외감 마저 느껴진다.
무명 710 고지는 북한이 서울로 진입하는 두 갈래의 길목중에 한 곳이어서 격전지 중의 한 곳이었다. 북한이 홍천, 횡성, 수원으로 최대한 빨리 진격하지 못하도록 여기서 시간을 끌어야 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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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 장병들이 무명용사의 수습한 유해를 태극기로 감싸고 있다. |
고지 정상에 올라서니 빨간색 깃발 수십여개가 눈에 들어온다. 금속탐지기가 수통과 탄띠, 탄피 등 금속을 탐지하면 이를 표시하는 지표다. 호가 있던 자리는 파란색 깃발을 꽂았다.
50여명의 장병들이 길게 대열을 이뤄 유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역을 삽으로 일일이 파내고 있었다. 유해가 훼손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진행하고 있었다. 굴착기를 동원해 작업을 할 수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렇게 수습된 호에서는 한 무명용사의 오른쪽 다리 정강이와 팔뼈 일부 일부가 수습돼 있었다. 두개골과 다른 신체 부위는 없었다. 당시 포탄의 공격을 받아 다 흩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위급하고 참혹했는지 짐작이 갔다.
국군인지 여부는 아군의 탄피와 당시 사용했던 똑딱이 단추를 근거로 판별했다. 유차영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이 국화꽃 한 송이를 손에 들고 헌화한 뒤 묵념했다. 뒤로는 대형 태극기가 눈에 들어왔다.
유해 일부는 한지로 감싸서 오동나무 관에 모셨다. 신원이 확인되면 태극기에 쌓여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무명용사 아닌 남편·아버지의 이름으로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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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차영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이 호국용사들의 유해발굴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
유차영 단장은 “인근 현장 임시 감식소와 봉안소에서 1차 판별을 한 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으로 모셔간다”며 “이 곳에서 인류학적, 법의학적 감식을 해서 신원을 확인하는 절차를 이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 단장은 “이제 무명용사라는 보통명사가 아닌 누구의 아들과 남편인 고유명사로 모시고 싶다” 며 “목숨을 담보로 자유를 지키신 이들의 유해를 가족들에게 보내드리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해 한구를 수습하는 과정이 쉽지 않지만 가족들이 아버지의 유해를 받아보고서 기뻐하고 눈물 흘리는 그 순간을 위해 지금도 땀 흘리고 있다”고 전했다.
입관이 끝나자 유해발굴에 참여한 50여명이 약식제례를 올렸다. 이어 양 옆으로 도열하며 최고의 마지막 예유를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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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용사 유해발굴 작업을 지원하고 있는 1군 사령부장병들이 태극기에 쌓인 유해를 향해 도열하며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
1군사령부 군단발굴단 안상수 중사는 “지난번 구성포 발굴때는 4구의 유해가 한쪽으로 몰아져 발견된 적이 있었다”며 “급하게 후퇴하며 나중에 찾아올거라고 기약하고 돌아선 것 같았다”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그는 “이제는 우리가 그 약속을 지켜 현충원에 모셔야 한다”고 말했다.
국방부 유해발굴단 김태민 상병은 “발굴과정에서 여성의 사진이 붙어있는 손거울을 들고 웅크리고 있는 유해를 보고 가슴이 아팠다”며 “마지막 한분까지 가족의 품으로 돌려드리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국방부 유해발굴단은 두 달여동안 진행된 가리산 유해발굴 과정에서 몸도 마음도 점차 지쳐갔다. 그러나 전장의 호국영령들을 조국의 품으로 모시는 일을 반드시 매듭지어야 한다는 생각에 오늘도 묵묵히 흙을 고르고 있었다.
무명용사들의 숭고한 발자취를 찾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한없이 자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