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봄바다에 취하고 향긋한 봄맛에 반하다
도다리 쑥국과 멍게밥…통영 맛 기행
통영에 봄이 왔다. 바다에는 기름진 봄 햇살이 자글거리고 산양해안도로에는 동백이 붉은 꽃을 피워물었다. 통영의 봄은 식탁에도 어김없이 찾아들었다. 도다리쑥국과 멍게비빔밥은 특유의 향긋함으로 미식가를 유혹한다. 새벽녘 서호시장에서 맛보는 시락국에는 뱃사람들의 건강한 활력이 넘쳐난다. 햇빛 좋은 봄날, 통영으로 맛있는 여행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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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통영항. 소박한 어촌마을은 남해 여행의 필수코스로 꼽힌다. | |
이맘때면 떠오르는 도시가 있다. 통영이다. 꽃샘추위라며 수은주는 영상과 영하를 오르내리지만, 통영은 훈훈하기만 하다.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이 이마를 어루만지고 짭조름한 소금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바다를 따라 이어지는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눈부신 햇살과 어룽거리는 아지랑이에 봄 멀미가 일어난다.
통영의 봄 풍경도 여행자의 가슴을 설레게 하지만 봄 통영이 선사하는 맛 역시 이에 못지않다. 아니, 풍경보다 오히려 즐거움이 더할수도 있겠다.
통영의 봄 음식 가운데 가장 앞자리에 놓이는 것이 도다리쑥국이다. 통영 사람들은 아무리 동백이 낭자하게 떨어지고 신록이 번져도 도다리쑥국 한 그릇을 먹기 전에는 아직 봄이 아니라고 한다. 강구 안 식당 문앞에 ‘도다리쑥국'이라는 메뉴판이 걸려야 비로소 통영에 봄이 당도한 것이다.
도다리는 바다를, 쑥은 뭍을 대표하는 봄의 전령이다. 도다리는 봄이 되면 산란을 끝내고 살이 토실토실 차오르는데, 살이 부드럽고 뼈도 연한 도다리와 언 땅을 뚫고 올라온 향긋한 약쑥이 만난 도다리쑥국은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몸에 활기를 불어넣는 보양식이다.
도다리쑥국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쌀뜨물에 된장을 풀고 절반 정도로 자른 도다리를 넣고 끓인다. 도다리가 완전히 익은 뒤 쑥을 넣는데 너무 일찍 넣으면 쑥이 풀어지고, 향이 사라진다.
쑥은 거문도, 욕지도, 사량도, 한산도 등 남해 섬들의 논둑길 밭둑길에서 자란 것을 쓴다. 비닐하우스 쑥은 도다리와 궁합이 맞지 않는다. 조미료도 일절 쓰지 않는다.
입속으로 밀려드는 봄내음 도다리쑥국·멍게비빔밥
도다리 살의 쫄깃한 질감과 향긋하면서도 강한 쑥의 냄새가 어울린 맛은 어느 문호의 글이나 고급 사진기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도다리살은 입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는다. 도다리쑥국이 가장 맛있을 때는 3~4월. 이때면 알이 통통하게 차고 살도 여문다. 이 시기를 놓치면 또 1년을 기다려야 한다.
도다리쑥국과 함께 통영의 봄을 책임지는 맛이 멍게비빔밥이다. 한입 입에 넣고 눈을 감으면 바다를 머금은 듯한 기분이 든다. 멍게 비빔밥에 들어가는 것은 멍게와 통깨, 김 가루, 참기름 4가지. 재료가 더 들어가도 안 된다는 것이 통영 사람들의 설명이다.
고유한 맛을 해칠 수 있다는 게 이유다. 멍게비빔밥을 맛있게 먹으려면 밥알이 눌리지 않게 숟가락이 아닌 젓가락으로 밥과 멍게, 양념을 삭삭 비벼야 한다. 멍게도 꼭꼭 오래 씹어보자. 바다 냄새가 더욱 진하게 퍼질 것이다.
뱃사람들의 도시답게 통영에는 해장국도 먹을 만한 것이 많다. 통영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음식은 시락국이다. 시래깃국을 일컫는 사투리다.
시락국은 장어머리를 고아낸 국물에 된장을 풀고 무청을 넣어 끓여내는데, 산초(제피)가루와 김 가루, 잘게 썬 고추와 부추무침을 먹는 사람 입맛대로 넣는다. 뜨끈한 국물이 맵싸한 산초가루의 향과 어우러져 시원한 맛을 낸다.
시락국과 함께 통영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해장국은 졸복국이다. 작은 붕어 크기의 졸복을 넣고 미나리, 콩나물과 함께 우려낸 국물은 진하면서도 담백하다.
국을 맛있게 먹는 방법 두 가지. 첫째 식초를 조금 넣을 것. 국물이 진해진다. 두번째는 나중에 뚝배기째로 들고서 국물을 후루룩 남김없이 마셔야 한다는 것. 그래야 제맛이 난다고 한다.
좀 낯설지만 쑤기미 매운탕이라는 음식이 있다. 쑤기미는 볼락과의 생선이다. 양식이 되지 않아 자연산만을 쓴다.
매운탕 마니아들은 삼식이 매운탕, 볼락 매운탕과 함께 쑤기미 매운탕을 최고로 친다. 고춧가루로만 양념하는데 국물맛이 개운하고 담백하기 그지없다. 살은 아귀와 삼식이의 중간쯤.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하다.
통영에 갔는데 충무김밥을 먹지 않는다면 서운하다. 1960~70년, 부산과 여수, 거제 등을 오가는 뱃길의 중심지였던 통영 여객터미널에는 언제나 뱃사람과 상인들이 북적였고, 이들을 상대로 한 요깃거리는 늘 인기였다.
이때 등장한 것이 충무김밥이다. 간단하고 상하지 않아 사람들이 즐겨 먹었다고 한다. 충무김밥은 맨 김으로 싼 밥과 슥박김치라고 불리는 무김치, 그리고 시락국이 전부다. 짠맛보단 시원한 맛과 매콤한 맛이 우선인 슥박김치는 사각사각 씹는 맛이 일품이다.
길 떠나는 어부들을 상대로 팔던 음식이어서 젓가락 대신 이쑤시개를 사용한다는 것도 특징.
통영문화마당 앞에는 ‘원조'를 내건 충무김밥집이 늘어서 있다. 맨밥을 김으로 싸고 주꾸미, 갑오징어 무침과 무김치를 곁들여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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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박해 있는 어선 위로 봄햇살이 쏟아져내린다. |
통영의 별미, 충무깁밥과 오미사꿀빵
경주에 황남빵이 있고 안흥에 찐빵이 있다면, 통영에는 오미사꿀빵이 있다. 1960년대, 오미사꿀빵집의 주인 할아버지가 밀가루 배급을 받던 시절, 빵을 만들어서 하나 둘 팔았는데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이 빵집에 간판이 없어서 사람들은 오랫동안 ‘오미사 옆집 빵집'이라고 불렀다.
오미사는 당시 빵집 옆에 있던 세탁소 이름. 세월이 흘러 오미사는 없어지고 ‘오미사 옆집'으로 불리던 꿀빵집이 ‘오미사'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팥소를 넣어 튀겨낸 빵을 끈적끈적한 물엿에 담은 후 깨를 뿌려낸다. 앞치마를 한 주인 할아버지가 정성껏 빵을 빚는 풍모가 ‘장인'을 연상케 한다. 오전 10시쯤 문을 여는데 그날 팔 분량만을 만들어 오후 서너 시면 다 팔고 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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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벽화마을 동피랑. |
통영은 예술의 고장이다. 시인 유치환과 김춘수, 작곡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이 통영에서 태어났다. 김춘수 시인은 통영이 ‘내 시의 뉘앙스가 되고 있다'고 했고 윤이상은 미륵도를 ‘우주의 소리를 들은 곳'이라고 말했다.
소설가 박경리, 시조시인 김상옥의 고향도 통영이다. 화가 이중섭도 한때 통영에 머물며 ‘통영 풍경' ‘복사꽃 핀 마을' 등의 그림을 그렸다.
통영 봉평동의 전혁림 미술관은 통영의 눈부시게 푸른 바다와 강렬한 햇빛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얼마 전 타계한 전혁림 화백은 한국 추상화의 대가로 꼽힌다. 통영에서 나고 자란 그는, 미술학교 한번 변변히 다니지 못했지만, 미국의 한 미술잡지에 한국 10대 화가로 꼽히기도 했다.
전 화백은 1977년부터 고향 통영으로 내려와 통영과 다도해를 화폭에 담았다. 현재 전혁림 화백의 아들인 전영근 화백이 운영하고 있는데 전혁림 화백의 작품 70여 점을 감상할 수 있다.
통영은 청마 유치환과 정운 이영도의 애틋한 러브스토리가 스민 곳이기도 하다. 청마는 통영에서 태어나 통영여중에서 교편을 잡던 중 이호우와 남매 시인인 이영도를 만나 사랑에 빠져 무려 5천여 통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청마 유치환의 러브스토리가 스민 곳
현재 중앙동 우체국은 골목 안에 있어 산만하지만 ‘행복'에 나오는 바로 그 우체국이다. 망일봉 청마문학관에는 청마 흉상과 빛바랜 육필원고, 유품 1백여 점이 전시돼 있고 청마문학관 뒤편에는 청마 생가도 복원돼 있다.
최근 통영의 명소로 떠오르는 곳이 동피랑이다. 철거될 운명이었던 마을이었지만 벽화가 그려지면서 이제는 주말이면 카메라를 든 사람들로 북적인다. 대한민국 전역에 부는 벽화마을 붐은 이곳 동피랑에서 시작됐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하하하>에서 문소리가 살던 집이 바로 이 동네다.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의 벽에는 커다란 고래와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그림이 그려졌다. 온통 푸른 바다로 가득 찬 벽도 있다.
골목을 걷는 내내 커다란 수족관 속을 걸어다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동피랑 언덕에 오르면 아름다운 통영항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왕 통영까지 왔다면 소매물도까지 가보자. 선착장에서 내려 정상인 망태봉까지는 넉넉잡아 30분. 망태봉에서는 등대섬이 내려다보인다. CF나 관광 안내 포스터에서 봤던 그 풍경이다.
얼마 전 KBS 인기 프로그램 <1박 2일>에도 소개됐던 곳이다. 썰물 때면 소매물도에서 등대섬까지 걸어 들어갈 수 있다.
글·사진:위클리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