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정 양립, 말처럼 그리 쉽나요?”
2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전재희 보건복지부 장관과의 ‘저출산극복 국민초청 공개 토론회’에서다. 100여 명 가까이 접수를 통해 토론회에 참석한 이들은 현실에서 부딪히는 고충을 토대로 다양한 정책대안을 제시해 정책담당자들을 진땀나게 했다.
아직 미혼으로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재학 중인 이고은(여) 씨는 “독신을 고집하는 건 아니지만, 여전히 일과 가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현실이 결혼을 망설이게 한다”며 결혼·출산·육아로 인해 여성이 차별받지 않는 직장문화정착이 선행돼야 함을 강조했다.
“결혼해 아이 2~3명 낳고 살고 싶다”는 인천대 재학중인 이경일(남) 씨는 “결혼을 한다는 것은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의무가 생기는데, 지금과 같은 취업난 시대에 결혼보다 취업이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다”며 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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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저출산극복 공개토론회’에서 한 참석 여성이 발언하고 있다.(사진=보건복지부 제공) |
20대 후반에 결혼하기로 했던 계획을 미루고 있는 직장여성 손명희 씨는 보육문제 고민이 가장 컸다. “아이를 시댁이나 친청에 맡기는 것으로 해결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도우미를 고용하는 것도 비용문제 때문에 현실적인 대안은 못된다. 직장인들이 맘 놓고 맡길 수 있는 보육시설이 부족한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제 갓 돌을 넘긴 자녀를 둔 조승희 씨는 지난 1년 간을 막노동에, 유격훈련을 받은 느낌이라며, 출산과 육아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조씨는 “처음엔 2~3명 낳아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막상 첫째를 낳고 기르면서 고민이 생겼다”며 “둘째, 셋째를 낳으면 정부가 많은 도움을 줘야하고, 특히 남편들도 집안일을 돕는 교육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는 10월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직예정인 직장인 최찬숙 씨는 “부부가 모두 7시 반 이후에야 퇴근하는데, 직장은 멀고 집 주변에는 늦게까지 돌봐주는 보육시설이 없어 걱정”이라며 “회사 자체에 야간이나 휴일 근무 때 아이를 돌봐줄 수 있는 보육시설을 갖추도록 해달라”고 했다.
올해 3월 첫 아이를 낳은 김유진 씨는 “두달 전 신종 로타바이러스 백신을 맞히는데 1차 20만원이 들었고 3차까지 맞히려면 70만원이 든다”며 “돈 내고 받아야 하는 예방접종이 많은데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했다. 조재정 씨도 “결핵 등 몇 가지를 제외하고 폐구균 예방접종은 3차까지 맞혀야 하는데 한번에 15만원이 드는 등 예방접종에 돈이 많이 들어서 병원 가는데 부담된다”며 예방접종의 보험적용 확대를 요청했다.
이지연 씨는 “공립어린이집은 한부모, 맞벌이 등의 조건이 맞아야 하는데 전업주부 가정도 이용할 수 있는 공립어린이집을 만들어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둘째 아이를 낳고 현재 육아휴직 중인 한 여성은 “첫째 낳은 뒤 복귀하니 육아휴직을 썼다고 승진에서 제외됐고 두번째 기회가 왔을 때에도 둘째를 낳기 위해 휴직에 들어간다고 하니 승진에서 또 제외됐다”며 “쉰다는 개념이 강한 ‘육아휴직’이 아니라 ‘육아업무’라는 용어를 써서라도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평소 저출산·고령화 문제에 관심이 많아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는 김한결(공익요원) 씨는 “선진사례를 벤치마킹, 확대할 필요가 있다”며, “특히, 국내에서는 대구 달서구가 아이를 기르고 있는 직장여성에게 탄력근무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정부가 전국 지자체에 권고해 확대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맞벌이 오정자씨는 “사설어린이집은 왠지 불안하고 이것저것 신경쓸 것이 많아 구립어린이집을 이용하려고 신청했지만 2년 째 자리가 나지 않고 있다”며 “어린이집이 방학이라도 하면 아이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전재희 장관은 이 같은 결혼·출산·육아에 대한 여러 고민과 요구에 대해 일일이 답변하며 향후 정책구상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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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회에서 전재희 장관이 향후 출산정책 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보건복지부 제공) |
전 장관은 예방접종 확대와 관련, “오는 12월부터는 동네 소아과에서 기존에 8000원 냈던 것을 2000원만 내도 8종의 예방접종을 맞을 수 있도록 추진하겠다”면서, 또 “A형 간염 예방접종도 필수예방접종에 포함될 수 있도록 예산당국과 협의 중”이라고 설명했다.
전 장관은 다만, “현재 8개 예방접종이 무료로 지원되고 있는데 이는 글로벌 수준”이라며 “꼭 필요하지 않은 예방접종을 지나치게 권유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 장관은 국·공립어린이집 대기수요 적체현상과 관련, “최근 조사에 따르면, 임신 중이면서 어린이집 대기명단에 올려놓거나 초등학교 입학 후에도 대기수요로 잡혀 있는 등의 문제로 가수요가 120%에 달한다”며 “앞으로는 1개월 내 입소 가능한 아이만 국·공립어린이집 대기자로 인정해 대기율을 낮추겠다”고 말했다.
이어 “국·공립어린이집에 대한 수요를 민간어린이집으로 돌릴 수 있도록 법 개정을 통해 교사 교체율, 수족구별 발병실태 등의 정보를 공개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내년부터 퇴근시간 이후나 공휴일에도 아이를 맡길 수 있는 ‘맞춤형 보육시설’ 설립 추진 계획도 소개했다.
보육료 지원과 관련해서는 “앞으로 셋째는 소득수준과 관계없이 보육지원비를 주도록 예산당국과 협의하고 있다”며 “가용한 예산 범위 내에서 많이 하도록 협조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박차옥경(여성단체연합회) 씨는 “출산부터 성장까지 정부가 함께 하고 있다는 인식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저출산종합대책을 만들 때 어떤 정책이 좋은 반응을 얻을 것인가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저출산 문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바 있는 KBS 김정희 PD는 “저출산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프랑스의 최근 출산율이 1.65명에서 2명으로 상승했다. 정부가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고 일과 가정의 양립을 배려해야 한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김 PD는 이어 “프랑스는 GDP의 3.8%를 저출산 대책에 투입하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0.3% 정도”라며 “저출산이 중요한 문제라고 인식한다면, 예산을 어디에 집중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