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에도 많은 이슈들이 인터넷을 통해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러나 많은 정보만큼이나 ‘아니면 말고’식의 의혹 제기나 악의적인 ‘괴담’이 넘쳐났다. ‘익명의 장막’ 속에서 사실여부에 상관없이 쏟아낸 주장들은 우리 사회의 통합을 깨고 문화를 멍들게 했다. 촛불 여대생 사망설에서 최진실 사채설까지 숱한 괴담성 주장들이 남긴 상처는 우리가 선진 사회로 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게 만들었다. 2009년 새해에는 ‘신뢰로 소통할 수 있는 정보의 바다’ 인터넷 여론 문화를 기대하면서 대한민국 정책포털 korea.kr은 ‘2009 인터넷, 새로운 모색’을 기획했다.
■ 감기 치료에 10만원?
우리나라에선 ‘어불성설’
“감기 치료에 10만원, 맹장수술비 300만원.” 올 한 해 동안 전 국민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인터넷 괴담 중 하나다. 충격적이고 분노를 일으키는 삽화 몇 컷이 상식적이고 논리적인 설명 백 마디를 압도하는 것처럼 자극적인 괴담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인터넷을 달구며 여기저기 퍼진 괴담은 국민의 불안감을 조성했고, 급기야 건전한 논의조차 차단시켜 버렸다.
특히 4월 3일 미국 국민의 20%가 건강보험의 보호를 받지 못해 비싼 의료비를 부담하고 있는 미국의 현실을 풍자한 영화 ‘식코’가 개봉하면서 이같은 괴담은 위력을 더했고 우려는 극으로 치달았다. 정부가 의료산업 선진화를 추진하면 우리나라도 영화 ‘식코’ 속 상황처럼 된다는 주장은 이성을 마비시켰다. 외국에 비해 취약한 보건의료서비스 분야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 많은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의료산업의 선진화 논의가 사라졌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국가가 운영하는 건강보험에 전 국민이 당연히 가입해야 하고 모든 병원은 건강보험 적용을 거절할 수 없다. 모든 국민이 의료기관에서 평등한 대접을 받는 상황에서 ‘식코’가 현실이 될 가능성은 ‘제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처럼 키에 비해 뚱뚱하다는 이유로 건강보험 가입에서 거절당하거나, 이 때문에 비싼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상처를 꿰매야 하는 상황은 있을 수 없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건강보험을 현재처럼 국민건강보험공단(국가)이 운영하고, 의료기관과 약국 등이 특별한 사유 없이 건강보험 적용을 거절할 수 없도록 한 ‘당연지정제’를 계속 유지한다. 보건복지가족부는 4월 29일과 5월 20일, 6월 13일 이 같은 입장을 천명했고, 이명박 대통령도 6월 19일 같은 입장을 강조했다.
그러자 괴담을 최대한 활용했던 일부 단체들은 식코를 연상시키는 ‘의료보험 민영화’에서 ‘보험’만을 빼고 ‘의료민영화’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한 번 머릿속에 자리잡은 인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식코와 동격으로 인식될 수 있는 ‘의료민영화’라는 단어는 인터넷 괴담의 ‘전가의 보도’가 됐다. 의료민영화라는 비난을 받으면 어떤 논의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대표적인 예가 의료기관 영리법인화와 실손형 민간의료보험상품 규제와 관련한 논의다.
■ 영리법인 도입하면 당연지정제 폐지된다?
근거없는 억측 불과
정부는 지난 정부 때부터 의료산업의 발전을 위해 영리법인을 도입하는 문제를 검토해왔지만 괴담을 앞세운 반대로 지금은 논의를 유보한 상태다. 현재 우리나라의 병원은 의료인이나 비영리 법인만이 설립할 수 있고 의료기관에서 거둔 수익은 병원의 울타리 내부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만약 영리법인도 의료기관을 설립하게 된다면 의료기관은 더 나은 자본을 유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수익을 주주 등 투자자에게 돌려준다거나 의료 사업 이외의 다른 사업에도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을 더 많이 유치하면 더 나은 시설과 장비로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나 영리법인 허용을 반대하고 있는 일부 단체는 영리법인 허용을 당연지정제 폐지와 연결시켜 ‘괴담’을 연상시키고 있다. 즉 돈벌이가 목적인 영리법인이 의료기관을 운영할 수 있게 된다면 진료비, 즉 의료기관의 수익을 제한하는 기존의 국민건강보험제도 아래에선 큰 돈을 벌 수 없으니 당연지정제 폐지를 요구할 것이고, 정부는 당연지정제를 폐지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엔 정부가 영리법인의 돈벌이를 ‘보장’해줄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있다. 정부에겐 영리법인의 돈벌이를 보장해줄 의무가 없다. 의료서비스를 개선해서 환자가 많이 찾으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하면 도태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영리법인이 허용되지 않은 지금도 경쟁에서 진 의료기관은 간판을 내리고 있다.
게다가 차분히 생각해보면 영리법인 허용문제와 당연지정제 적용 문제는 별개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리법인 허용 문제는 의료기관 개설권에 대한 진입규제와 관련된 문제이고, 당연지정제는 국민건강보험 적용문제를 범위를 어디까지 할 것이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약 영리법인을 허용하더라도 당연지정제를 유지한 상태라면 기존 환자가 누릴 수 있는 의료서비스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게 정부 측의 생각이다. 이미 많은 비영리법인 의료기관도 수익을 목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상황이다. 달라지는 것은 개설권자와 수익 활용방법, 의료기관간의 경쟁 확대 정도다.
■ 민영보험 정비하면 건강보험 사라진다?
민영보험은 건강보험 보완 역할 담당
괴담의 여파는 정부의 민영보험 정비 계획에도 영향을 미쳤다. 복지부는 지난해부터 개인부담금과 비급여 등 진료비에서 환자가 실제 부담한 비용을 보상해주는 실손형 개인의료보험을 정비하는 작업을 추진해왔다. 오래 전부터 판매되고 있는 실손형 개인의료보험 상품이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상품 자체가 복잡하고 전문적이라 가입자가 보험 가입 당시에 기대했던 보험금을 받지 못하는 등 피해사례가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 특히 상품 가입자의 도덕적 해이를 조장해 국민건강보험 재정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2007년 국민건강보험의 보장률은 64.6% 수준. 총 진료비가 10만원이 나온 경우 6만4600원을 국민건강보험측이 부담하고, 환자는 본인부담금 등 3만5400원을 부담했다는 이야기다. 이 환자가 실손형 의료보험에 가입했다면 최대 3만5400원까지 보상받을 수 있어 진료비 부담이 적다.
바로 이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의료서비스를 이용하는 등 도덕적 해이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 불필요한 의료서비스 이용을 줄이지 못하면 국민건강보험 재정이 악화된다. 환자는 진료비를 100원도 부담하지 않지만 국민건강보험은 환자가 진료를 받을 때마다 진료비의 64.6%를 꼬박꼬박 대신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정부는 개인의료보험 보장범위를 설정하고 소비자보호 방안을 마련하는 한편 상품을 표준화하는 방안을 추진해왔지만 괴담이라는 벽에 맞닥뜨린 상태다. 제도 개정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소비자가 민영 개인의료보험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시기가 늦어진다. 또 국민건강보험 적자도 더 커진다. 결국 손해는 국민에게 돌아간다.
한편 일부는 정부의 정비로 민영보험이 대중화되면 국민건강보험을 대체해, 결국 건강보험을 민영화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손형 개인의료보험은 국민건강보험이 보장하지 않는 비급여와 본인부담금을 보장하는 것으로, 국민건강보험을 보완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괴담 관심을 건강보험 숙원 해결로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을 지금보다 높이면 실손형 개인의료보험을 정비할 필요가 사라진다는 주장도 있다.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정부도 공감하는 바다. 문제는 재원이다. 현재 국민건강보험 재정은 악화 일로의 길을 걷고 있다. 특히 고령 사회를 눈앞에 둔 상황이라 재정 악화는 더욱 심해질 전망이다.
이는 낮은 건강보험료 수준에 비해 보장성을 크게 확대한 영향이 크다. 정부도 일정 부분 지원하고 있지만 교육과 국방, 다른 복지 등에도 예산을 투입해야 하는 정부 입장에선 현실적으로 이쪽만 배려할 순 없는 처지다.
이런 까닭에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은 9월 4일 국회 보건복지가족위원회에서 “보장성을 강화하기 위해선 두 가지의 큰 길이 있는데, 하나는 감기처럼 가벼운 질환에 대한 본인 부담을 늘리고 암처럼 고액 진료비가 드는 질병에 보장을 많이 해주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보험료율을 높이는 것”이라며 “보험운영을 효율화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높은 보장성을 자랑하는 선진국은 모두 우리보다 많은 보험료율을 적용하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의 보험료율은 우리의 세 배 수준이고 대만과 일본도 우리의 1.6~1.8배 수준이다. 결국 선진국과 같은 보장성을 확보하려면 보험료율을 높여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한 네티즌은 과거 괴담이 한참 나돌았던 5월 “이렇게 싼 보험료에 양질의 진료를 받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며 “보험료 조금 인상하면 안 된다고 하더니 민영화한다니 지켜내라고 난리인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지금이라도 보험료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번 괴담은 국민건강보험에 대한 국민의 높은 관심을 드러냈다. 이 같은 관심이 적극적인 고민으로 이어진다면 괴담의 허구성을 깨닫고, 오랜 숙제의 답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